본문 바로가기
옥하사담

정헌공 편 조상의 근원

반응형


안동권씨 14세 정헌공은 고려 충렬왕22년(1296)에 출생하여 충정왕1년(1349)에 돌아가셨으니,54세를 향수하신 고려의 정승 계림부원대군이시다.


본 성명은 권재,몽고명은 튀환,시호는 정헌이시며,아버님은 정승 국제공 권보이시다.

형 준이 충선왕이 원나라 서울에 머물고 있을때,왕의 신임을 받았는데 형제의 사정을 묻고 권재의 출중한 인품을 듣고 보기도전에 벼슬을 내렸고 다시 일약 삼사 판관에 특진시켰다.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권재를 불러서 처음으로 만나보자 아들로 입적하였으니 그때 나이 16세였다.


1308년 충렬왕의 서거로 충선왕과 함께 귀국하여 사복부정,사헌집의 등을 역임했다.


충숙왕 1년에 삼중대광으로 계림부원군에 봉해지고 1316년에 다시 부원대군으로 진롱 왕제라고까지 불렸으니,이때 나이는 불과 21세였다.


충선왕이 고려에 돌아와서는 항상 같은 수레에 타고 다녔다.

충숙왕7년에 충선왕을 따라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자,충선왕은 원나라 황제에게 요청하여 그를 원나라 황태자의 시구투치로 삼게 하고 계림군궁의 작위와 땅과 집도 받았다.

이해 환관 빠엔투구스의 모함으로 충선왕이 토번으로 귀양가게되었을때,왕을 대신하여 가겠다고 말함으로써 황제를 감동케했다.

이에 투구스는 그를 해치지 못했다.


문객3명을 데리고 토번에 가서 충선왕을 만났을때,마침 용서한다는 황제의 명령이 내려서 충선왕을 모시고 원나라 서울에 돌와왔다.

충선왕이 세상을 떠나자 상복을 입고,관을 모시고 고려에 돌아왔다.

이미 장사를 지낸 뒤에도,초하루와 보름에는 능을 찾아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을 종신토록 그치지않았다.


충혜왕 복위3년 원나라에 가서 서거한지 오래된 충선왕의 시호와 충숙왕의 시호를 받아가지고 돌아왔으며,충목왕 즉위때 성절사로 또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해 우 정승에 기용되고 이듬해 정방을 폐하고 과전을 복구했다가 탐삭한 무리들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347년 원나라 황제의 입조명령을 받고 들어가 좌정승 김영돈과 함께 조칙을 가지고 돌아와서 정치도감을 설지 영돈과 함께 판사가 되어서 전제를 정비했다.


이해 기황후의 친척인 기삼만이 기황후의 세력을 믿고 남의 땅을 빼앗는등 불법을 자행하자 그를 순군옥에 가둔것이 옥사하여 문제가 일어났음에도 영도첨의사사에 올랐다.

이듬해 다시 정승이 되어 기철과 함께 정동서의 일을 섭행했으며,충정왕1년에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오던중 요동 창의현에 이르러서 병사했다.


원나라 조정의 신임도 두터웠고,본국에서 여려차례 정승을 지냈으나 항상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나라일에 정성을 다했다.

성품이 곧고 진중하며 풍채도 훌륭했고 말이 없었다.

또 손님을 즐겨 맞이하고 아랫사람에게도 겸손하여 예절을 다했다.


요동에서 객사하니 요동의 관원이 관을 전해왔다.

이때 노척은 앞서 왕후가 자기의 비행을 추궁한데 원심을 품고 연로의 역에 명령하여 그의관을 정청에 모시지못하게 하였으나,역졸들을 자진하여 맞아들여 울며 제사지내니 마치 부모상 같았다고 한다.

공민와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당성홍씨,묘는 경기도 장단군 진동면 기온리 배위 부자.대제학 이인복 찬,묘지령 돈영 권홍 씀.


참고문헌:조선 인명사전,한국 인명사전 및 국사대사전

대동보 및 파보에는 배위가 남양 홍씨로 되어있으나,묘소 비문에는 당성 홍씨로 새겨져있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