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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하사담

한국에서 천주교박해가 발생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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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박해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절두산성지를 가보면, 왜 이토록 한국에서 천주교가 그토록 끔찍한 박해를 받았는지 의아심이 생깁니다.


그만큼 천주교박해로 숨진 한국 천주교신자들의 숫자가 수천명에 이르기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주교박해는 어떠한 이유로 발생한것일까요?


한국에서 천주교박해가 발생한 이유


서구사상인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약 100년동안 박해가 있었습니다.


박해의 원인으로 크게 세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사상의 차이때문입니다.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전통적 유교사상과 박애를 근간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평등사상이 충돌한것입니다. 신자들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앞에 평등하므로,양반과 천민의 신분적차별을 부정했습니다.


또한 천주교에서는 여성도 남성과 다름없는 인격체임을 주장하였습니다.


부부간 화목과 이해를 강조하여 남편은 아내에게 폭행을 가하거나,학대하지못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아내가 자식을 못낳는것을 이유로 구박하거나 유기하는 행위를 엄금하였습니다.


과부의 재혼과 독신을 정당한것으로 인정했으며,결혼에 있어서도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혼인을 금지하였습니다.




둘째,천주교 신자들이 조선의 전통적인 예절인 조상제사를 거부하였기때문입니다. 


우리나라사람들은 충효사상을 중히 여겨서 조상제사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황청에서는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겨 금지하였습니다.


이에 초기 한국천주교 신자들은 조상제사를 지내지않았습니다. 조상제사보다 교회의 가르침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였기때문입니다.


우리신앙의 선조들은 인간 존엄성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대군대부라고 부르며,믿음을 버리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했습니다.


셋째,당파싸움의 방편으로 이용되었고 서양세력의 진출에 대한 거부감이 표출되었기때문입니다.


1801년 신유박해는 사파와 벽파간 정쟁중에 일어났고 1839년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의 세도권 쟁탈전 가운데서 발생했습니다.


1966년 병인박해는 러시아세력의 남하를 제지하고자 천주교에 접근하려던 흥선대원군이 유림과 반대세력에 부딪히면서 위기를 극복하고 집권을 강화하고자 자행한 정치적타살의 결과였습니다.


출처:천주교예비교리서 '함께 하는 여정'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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