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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하사담

4.19혁명의 원인과 진행과정,그리고 이승만 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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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국립묘지와 기념관을 다녀왔다.  서울에 이런곳이 있을까 싶을정도로 고요한곳에 4.19의 선열들이 잠들어 있어서 진작 가보지못한것이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4.19혁명이 어찌 시작되었는지 원인과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4.19혁명의 원인

 

우리나라는 1945.8.15일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지만 6.25사변으로 온 나라가 황폐해지고 국민들의 생활은 곤경에 빠졌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국가를 재건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주력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장기집권에 몰두하여 민의를 거스른 독재정치를 지속했다.

 

 

 

 

국민의 신임을 잃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간접선거에 의한 당선이 어렵게 되자,직선제로 헌법을 바꿔서 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다시 영구집권을 위한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없애고 헌법을 고쳐서 3대 대통령이 되었다.

 

1960년 3월15일 4대 정부통령선거에서는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승만과 이기붕이 정부통령에 당선되어서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었다.

 

4.19혁명 진행과정

 

1960년 2월28일 대구에서는 일요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야당유세참여를 막기위해서 강제로 등교시키자 시위가 일어나 3월14일까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대통령 선거일인 3월15일에는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폭로하여 선거무효를 외치는 시위대에게 경찰이 총을 쏘아서 진압했다. 4월11일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학생과 시민들이 2차 마산시위를 벌였다.

 

 

 

 

4월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도중 정치깡패들에게 피습당하자,고교생과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전국으로 시위가 퍼져서 다음날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4월25일 대학교수단 258명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서자,소강상태에 빠졌던 시위는 활기를 띄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총을 쏘며 시위를 진압해서 총 186명이 사망하고 6천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마침내 4월22일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부통령 당선자인 이기붕 일가족은 자살했다.

 

이로써 4.19혁명이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게 된것이다.

 

출처:국가보훈처 국립4.19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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